탁트인 전망, 황홀한 야경…낮보다 夜한 ‘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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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트인 전망, 황홀한 야경…낮보다 夜한 ‘낙산’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9.08.07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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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야경명소’ 서울 낙산…현대사의 산물 봉제공장 골목도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성벽선. 화려하게 빛나는 도심 속 불빛과의 조화가 눈에 띈다. 사진/ 이혜진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이혜진 기자] 서울 도심에 몽마르트르 못잖은 정취 있는 언덕이 있다. 6일 오후 종로구 동숭동‧창신동 일대의 낙산에 올랐다.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낙산에 올랐다. 흥인지문에서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높이가 낮아 남녀노소가 쉽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사진/ 이혜진 기자

지금은 주변에 여러 건물이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2012년 발간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에 따르면, 낙산은 예부터 산세가 낙타의 등과 비슷해 ‘낙타산’이라고 불렸다.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던 소를 키우던 곳이라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렸다.

낙산공원은 1‧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나 6호선 창신역 4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종점에서 내려 도착할 수 있다. 높이가 125m에 불과해서다. 낙산과 좌청룡‧우백호의 짝을 이루는 인왕산이 해발 332m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셈. 이날은 혜화역 3번 출구에서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걸어갔다. 

낙산 정상 부근. 걷다보면 인근에 이화동 벽화마을과 창신동 봉제공장 등이 있어 삶의 현장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낙산에 대해 요즘 사람들에게 “낙산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강원도’나 ‘동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날 낙산은 비교적 호젓했다.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엔 커다란 이팝나무 여러 그루가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날은 이미 개화시기가 2개월여 지난 뒤였다. 내년 봄에 다시 오면 이팝나무꽃의 수더분함에 매료될 수 있을 듯하다. 

낙산공원은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비교적 호젓하다. 혜화역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1, 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6호선 창신역 4번 출구에서 낙산공원행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사진/ 이혜진 기자

낙산 정상으로 향하다 보니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도로가 보였다. 1969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이곳에 세운 낙산시민아파트 때문에 닦은 길이다. 서울시는 1998년 아파트를 철거하고 근린공원을 만들었지만, 근대화의 생채기처럼 느껴졌다.

낙산의 명당인 이화장에 올라서자 경복궁과 종묘 등 서울 북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리의 연인’ ‘불새’ ‘더킹투하츠’ ‘하트시그널’ 등 인기 TV 프로그램의 야경 장면에 단골 촬영장소로 등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낙산공원 정상 주변에 꽃이 활짝 피어있다. 정상에서부터 혜화문과 흥인지문 방면 양 방향으로 펼쳐진 성곽 길은 여러 드라마에서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속삭였던 전망 좋은 길이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이처럼 빼어난 경치 때무인지 이화장은 과거 흥선대원군의 8대조 인평대군의 집인 석양루가 있던 터이기도 하다. 조선 성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성현은 문집 ‘용재총화’에서 낙산을 삼청동, 인왕동, 백운동, 청학동과 더불어 한양도성 5대 명승지로 꼽은바 있다. 지난 2015년 서울시가 실시한 조사에선 시민과 관광객이 꼽은 조망점 1위로 꼽혔다. 

정상에서부터 흥인지문 방면으로 펼쳐진 길은 황홀한 야경에 데이트명소로도 알려져있다. 길을 걸으니 옆으로 조선시대 한양의 경계인 서울성곽(사적 10호)이 보였다. 

옛부터 낙산은 남산, 달맞이봉과 함께 정월대보름 달맞이 3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 밤에도 문을 닫지 않으나 주차시설이 협소하니 공원 홈페이지에서 참고하는 것이 좋다. 사진/ 이혜진 기자

서울성곽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직후인 1396년 당시 연인원 11만여 명을 동원해 지었다. 현재 낙산공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 성곽은 약 3km 정도. 

성곽 길을 걸으니 북악산과 북한산 능선으로 넘어가는 일몰과 서울 도심 야경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붉은 노을은 덤이다.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김치를 담가 준 궁녀 홍덕에게 하사했다는 ‘홍덕이 밭’ 같은 역사의 자취도 엿볼 수 있었다.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남산타워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주말에 데이트를 한다면 대학로를 찾아 낮 시간에 연극 한 편을 본 뒤 주변 맛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해질 무렵 낙산에 올라 야경을 봐도 좋다. 사진/ 이혜진 기자

걷다보니 자연스레 이화동 벽화마을과도 연결됐다. 서울 마지막 달동네로 불렸던 이곳은 최근 몇 년 간 예술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방과 작업실을 열고,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려 예술을 입힌 쉼터로 변화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본인들이 살다 해방 후 일반인들에게 불하된 적산가옥 수백 채가 수십년 동안 제대로 보수되지 못한채 남아있어 세월의 흔적을 간직했다. 

낙산 비탈에 위치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오토바이가 원단을 분주하게 옮기고 있다. 골목 양편에 밀집한 주택들은 얼핏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수북이 쌓여 있는 옷감이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길을 걸으며 동북부 쪽으로 눈을 돌리니 점차 사라져가는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산 아래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만들어진 동네인 창신동도 마찬가지. 

그래도 성곽 바깥 비탈을 따라 촘촘히 이어진 창신동 봉제골목에선 옷짐을 옮기는 오토바이와 외국인 노동자들이 곳곳에 보여 생기를 띠었다. 간혹 미싱소리도 들렸다. 한때 국내에서 유통되는 옷의 3분의2 정도가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에서 팔렸는데, 그 옷의 상당량이 이곳에서 제작됐다고 한다. 얼핏 가정집처럼 보이는 창신동의 공장 수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실핏줄 같은 길에 있는 곳까지 더하면 수백여개가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처럼 공장이 많아서인지 낙산 비탈길 중에서도 봉제공장이 가장 밀집해 있는 창신동 647번지 일대에선 전태일재단 건물이 보였다. 지난해 봉제산업을 주제로 서울시가 재생사업을 진행하며 건립한 이음피움 봉제역사관도 인근에 있다. 골목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인 이곳을 걸으니 ‘노찾사’의 민중가요 ‘사계’ 중 봄의 노랫말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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