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천년고도 나주, 영산강이 그리는 더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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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천년고도 나주, 영산강이 그리는 더딘 풍경
  • 이혜진 기자
  • 승인 2019.07.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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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나주 합쳐 전라도… 비단길을 걷던 나주의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에 '느러지전망대'에 올라서면 유장하게 휘돌아가는 영산강 강줄기의 황홀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왼쪽 물길을 따라 오르면 ‘영산강 3경’(나주황포돛배)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이혜진 기자

[트래블바이크뉴스=이혜진 기자] 전성기만 1000년. 영산강을 끼고 넓은 들판에서 자란 곡식은 이곳의 경제, 행정은 물론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그러나 비단길이 짓이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비단길 끝자락에서 다시 100여년이 흘렀지만, 짓이겨진 비단길은 해진 채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다른 지역이 그 사이 빠르게 변화한 데 반해 이곳은 아직도 느린 걸음을 걷고 있다. 

올해로 이름 붙은 지 1000년이 된 ‘전라도’의 ‘전’은 북도의 전주, ‘라’는 남도의 나주에서 따온 말이다. 1000년이 흐르는 동안 전주는 여전히 전북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남에서 나주는 저 광주광역시에 의존하는 도시에 불과하다. 

전남 나주를 상징하는 나주읍성 남문지. '작은 한양'이라 불리던 나주는 광주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쇠락을 거듭해 왔다. 읍성 주변은 1~2층 건물에 좁은 골목으로 연결돼 시골마을의 정취를 풍긴다. 사진/ 이혜진 기자

위상이 높았던 나주가 지금처럼 지방 소도시로 전락한 것은 1895년부터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에선 나주가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난파 정석진이 나주 의병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들은 관군에 진압됐다. 이후 의병은 일본에 의해 민란으로 규정, 이듬해 나주의 관찰부는 광주로 이전됐다. 이때부터 나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나주에서 가장 먼저 들른 나주읍성은 다른 지역과 달리 성벽이 둘러쳐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해설사는 “일제 때 나주 개발 명목으로 성벽이 해체돼 가옥의 주춧돌과 기둥으로 사용됐다”며 “동서남북으로 남고문, 동점문, 서성문, 북망문이 복원됐지만 부지가 넓어 다른 읍성처럼 한 바퀴 돌아보긴 힘들다”고 설명했다. 2012년 발간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에 따르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주를 일컬어 작은 서울이라는 뜻의 ‘소경’이라고 부른다”는데, 설명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지방 관아의 객사로는 가장 커 '작은 한양'을 상징한다는 금성관. 안으로 들어가면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 등 궁궐 같은 짜임새를 갖췄다. 하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읍성의 중심이 되는 건물은 금성관이다.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이었는데 역시 비단이란 뜻을 품고 있다. 왕을 상징하는 지방궁궐이자 객사로 사용된 금성관은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경복궁처럼 금성관에 가려면 삼문을 거쳐야 한다. 외삼문, 중삼문은 있지만, 내삼문은 터만 남아 있다. 가운데 금성관을 중심으로 양편으로는 관리들이 묶던 객사 건물이 붙어 있다. 일제 때 지방궁궐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외삼문이자 2층 누각인 망화루에서 내려다보는 금성관 처마끝과 나주의 진산 금성산 자락이 이어져 있는 듯한 풍광이 제법 운치 있다. 

망화루 서쪽 동헌의 출입문 ‘정수루’ 2층엔 ‘신문고’ 역할을 하는 북이 있다. 원위치는 알 수 없지만, ‘원통한 일을 말하고 싶을 때 치라’고 북을 설치한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을 기려 설치했다. 정수루를 지나 보이는 목사의 살림집 목사내아 금학헌에서는 숙박을 할 수 있다. 김성일과 나주 백성들이 상소를 올려 나주에 두 번이나 부임했던 유석증 목사의 이름을 딴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전국 최대 규모와 유래를 자랑하는 나주향교. 조선 초기에 건립된 나주향교는 한 번도 화재를 당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다. 서울의 성균관이 화재로 소실된 후 나주향교를 본받아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진/ 이혜진 기자

동학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서성문을 지나면 나주향교가 나온다.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춘 향교다. 성균관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됐을 때 이 건물을 참조했다고 한다. 

비단길을 걷던 나주의 과거를 느끼게 하는 곳은 또 있다. 나주 곡창지대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영산강이 그 주인공. 영산강을 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강면 옥정리 느러지 전망대에서 영산강의 물돌이를 볼 수 있는데, 일몰 때가 분위기 있다. 느러지란 말은 영산강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여 길게 늘어진 지형에서 따왔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위치한 영산강 보. 강 바로 옆엔 영산지구공원 염색 작물원과 천염 염색 문화관 그리고 나주시 천연 염색 공방이 있다. 다시공영버스터미널에서 차로 7분이면 도착한다. 사진/ 이혜진 기자

공산면 신봉리 금강정에서도 영산강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선 일출이 아름답다. 나주영상테마파크 인근 작은 정자인 금강정에서 오른편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탁 트인 풍경이 나온다. 이맘때는 운해가 심해 강줄기가 잘 안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흰 운해가 햇빛을 받아 붉은 비단으로 변하는 풍경이 마음을 더 쿵쾅거리게 한다. 

이어 방문한 곳은 나주반 전수교육관. 앞서 일본인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1889~1961)가 1937년 조선을 여행하며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의 소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주반의 이름을 오랫동안 들었을 것이다. (중략) 하지만 마을을 나와 나주반을 찾아보아도 파는 가게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시중엔 나주반이라고 불리는 것이 팔리고 있었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제작 기법이 전수되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김춘식 소반장(83)과 막내아들인 김영민(48) 씨가 나주반을 만들고 있다. 김 소반장은 1986년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주반장으로 지정됐고, 마침내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사진/ 이혜진 기자

명맥이 끊긴 나주반을 복원해낸 사람은 국가무형문화재 제99호 김춘식(83) 소반장(음식 그릇을 올려놓는 작은 나무 상인 ‘소반’의 장인). 19세 때부터 목수 일을 시작했다. 이수자는 막내아들 김영민(48) 씨. 소반 제작을 배우려는 수강생은 많았어도 전통 방식을 통한 제작 과정을 견디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나주반과 타 지역 소반의 차이에 대해 “해주와 통영은 소반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장식하지만 나주반은 소박하고 간결하다”고 말했다.

나주반 교육관 내부의 전시관. 오른쪽 고가구 옆에 나주반이 보인다. 김 소반장은 나주반을 만들기 위해 20여년간 수백개의 상을 해체해 연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간단한 운각, 둥글면서 날렵한 다리 선 등이 특징. 사진/ 이혜진 기자

교육관 안엔 다양한 나주반이 전시되어 있다. 돌날 받는 돌상, 첫날밤의 합환상, 주막에서 술 마실 때 받는 개다리소반, 보릿고개 때 밥 대신 소박하게 차린 밥상, 예순 살 생일을 맞아 받는 환갑상, 늙고 병들어 받는 약상이 모두 소반이다. 삼신할미에게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 때도 쓰였다. 

‘남파고택’에도 갔다. 1939년 난파 정석진의 손자가 어머니를 위해 당시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건축대서사(건축가) 자격증을 지닌 박영만에 의뢰해 지은 집이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가미한 특이한 양식으로, 당시 나주에서 제일가는 부잣집이 한껏 멋을 부린 시험적 저택이다. 

나주를 대표하는 전통한옥인 남파고택. 조선시대 후기에 건립한 가옥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63호다. 전남 양반집 건축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 이혜진 기자

이날 저녁 방문한 곳은 ‘힐링 피서’를 즐길 수 있는 농어촌마을인 나주시 문평면 ‘명하쪽빛마을’. 5대째 쪽염색을 해온 국가무형문화재 제11호 염색장(전수교육조교) 윤대중(55) 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선 전통방식으로 스카프, 손수건 등에 쪽염색을 해볼 수 있다. 인근에 위치한 한국천연염색박물관에 가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다음날인 30일 오전 들린 곳은 ‘영산포 역사갤러리’. 이곳에선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 건물을 개조해 홍어와 영산포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이날 자원봉사자로 전시 해설에 참여한 마을 주민은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피해 육지로 이주했던 영산도 주민들이 보름 가까이 걸려 영산포(당시 남포)에 도착하자 물고기 중 홍어만 썩지 않았다”며 “삭았지만 먹어도 탈이 없어 먹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주시 영산동엔 1930년대 나주 대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이 있다. 당시 그는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이곳에 정착해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내부 층고가 상당히 높다. 사진/ 이혜진 기자

갤러리 근처엔 일제시대 때 나주 최대 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의 저택이 있다. 1935년 일본에서 목재와 기와를 가져와 당시 서양의 건축기법을 가미한 저택은 현재 가톨릭광주사회복지회에서 나주시 노인복지관과 전통찻집으로 쓰고 있다. 이곳에선 오는 31일까지 마을 주민인 조세연 씨의 자수 작품을 전시한다. 인근엔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의 건물과 문 닫은 ‘영산포극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나주는 고속철을 이용하면 서울역에서 나주역까지 약 2시간이 걸린다. 나주역은 나주 시내와 영산포 사이에 위치해 어느 쪽이든 편리하다. 나주역 근처의 금성관 앞엔 원조를 내세우는 3개 식당을 비롯해 나주곰탕거리가 형성돼 있다. 아삭한 깍두기 김치를 얹어 먹으면 일품이다. 한 그릇에 평균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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